
‘오늘 밤 주문하면 내일 눈뜨기 전 도착한다’는 마법 같은 슬로건과 함께 등장한 새벽배송은 한국 유통·물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꿨다.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물류 혁신은 어느새 우리 일상의 뉴노멀(New Normal)이 됐다.
지난 10여 년간 쉼 없이 성장해 온 새벽배송을 두고, 노동계는 ‘건강권’을 이유로 금지를 주장하고 있으며 관련 업계는 ‘생존권’을 내세워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소비자와 정치권까지 논쟁에 뛰어들면서 논란은 국가적 쟁점으로 확대됐다.
“새벽 노동은 2급 발암물질, 새벽배송 금지해야”
갈등의 불씨는 지난 10월 22일 더불어민주당과 국토교통부가 주도한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 1차 회의에서 시작됐다.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은 최근 5년(2019~2024년 8월)간 산업재해로 승인된 택배노동자 사망자가 51명이며, 이 중 질병 사망자 35명 모두가 뇌심혈관 질환자였다고 밝혔다. 또한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야간 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분류한 점을 들어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새벽배송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택배노조는 “초심야(자정~오전 5시) 배송만 제한하자는 것”이라며 “새벽배송 전면 금지가 아니다”라고 입장을 일부 조정했다. 오전 5시 출근조와 오후 3시 출근조로 나누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누구를 위한 금지인가”… 노동계 내부에서도 균열
택배노조의 주장에 다른 노동자들도 반대 의견을 냈다. 새벽배송 최전선에 있는 쿠팡 직고용 기사(쿠팡친구)와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는 즉각 반발했다. CPA가 야간 택배기사 2,4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93%는 ‘심야 배송 제한’에 반대했고, 95%는 “야간 배송을 계속하겠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새벽배송 기사는 “야간에는 차량이 거의 없어 같은 물량도 훨씬 빠르고 편하게 소화한다. 야간수당까지 붙어 수입도 더 좋다”며 “스스로 선택한 ‘꿀 시간대’를 왜 강제로 제한하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0~5시를 막으면 5~7시 2시간 동안 전쟁하듯 배송하라는 뜻인데,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 역시 미온적이다. 시간 규제 같은 물리적 조치보다 ‘주 50시간 근무제 준수’ 등 근본적 처방이 우선이라며 “택배노조의 주장이 현실적인가에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뿔난 소비자들 “내 삶의 패턴을 흔들지 마라”
소비자 반응은 냉담을 넘어 분노에 가깝다. 특히 맞벌이 부부·1인 가구에 새벽배송은 단순 편의를 넘어 ‘생활 유지 수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와함께·한국소비자단체연합회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1%가 “새벽배송 중단 시 불편을 느낄 것”이라고 답했다. 이용 경험자는 99%가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는 “야간 장보기가 불가능한 맞벌이 가정에게 새벽배송 금지는 청천벽력”이라는 워킹맘의 글이 올라와 닷새 만에 1만 명 이상 동의를 얻었다. 소비자들은 택배노조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소상공인·연관 업계 “생태계가 무너진다”
새벽배송 금지는 유통사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과 연관 산업에도 직격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깊다. 새벽배송 생태계 안에서 함께하고 있는 수 많은 소상공인과 연관 산업 종사자들의 밥줄을 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상공인연합회는 “많은 소상공인이 새벽배송으로 신선 식재료를 공급받는다”며 “중단되면 사장님들이 새벽 직접 시장을 봐야 하고 이는 인력 부담, 영업 준비시간 부족으로 이어진다. 손실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전세버스생존권사수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야간 물류 현장이 무너지면 수많은 근로자의 생계가 위협받고, 출퇴근을 맡아온 전세버스 업계 역시 존립 기반이 붕괴된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전면 제한은 소비자 불편, 농어업인·소상공인 피해, 물류 종사자 일자리 감소 등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로지스틱스학회 연구에 따르면 새벽배송 플랫폼 이용자는 2,000만 명이 넘는다. 새벽배송과 주 7일 배송이 중단되면 택배 주문량이 약 40% 줄고, 소상공인 매출은 18조 3,000억 원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커머스 매출 감소 33조 원까지 합하면 경제 손실은 54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새벽배송 금지 논란, 균형점 찾을 수 있을까
새벽배송 금지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가운데, 향후 열릴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가 ‘노동자 건강권’과 ‘소비자 편익·산업 경쟁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사회적 대화기구는 오는 11월 28일 3차 회의를 열고 과로사 방지를 위한 근무환경 개선, 근무시간 단축에 따른 수입 보전 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택배노조는 △프레시백 회수·처리 인력 분리 운영 △배송 마감시간 제도 개선 △근로시간 단축(야간 기준 주 46시간) △주 5일 근무제 도입 △최저수수료제 시행 등을 요구안으로 제시할 예정이다.
한국노총은 야간배송을 최소화하면서도 산업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탄력 근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유통·물류업계는 “현행 새벽배송·주 7일 배송 시스템을 유지한 채 실현 가능한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며 “새벽배송이 중단되면 수많은 일자리와 부가가치가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특히 새벽배송 의존도가 높은 컬리는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극단적 주장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