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 외길을 올곧이 걸어갔던 물류산업의 역사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
“낚시대를 열 개 스무 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한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듯이,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은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한진그룹의 창업자인 조중훈 회장이 한진을 키워가며 내세웠던 철학들이다. 또 수송보국(輸送報國 : 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이라는 창업정신은 현재까지도 한진의 경영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중훈 회장은 물류산업의 1세대의 정점이자 물류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인물이다. 한진상사로 시작해 대한항공, 한진해운 등을 설립하며 육·해·공 전체의 수송 기업을 만들었던, 그리고 수송 외길을 올곧이 걸었던 조중훈 회장은 물류산업을 이끌었던 선각자이자 리더로 부족함이 없다.

트럭 1대로 시작한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이 물류와 연을 맺은 것은 25살에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으로 1945년 11월에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조중훈 회장은 한진상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등록하려고 했다. 해방이 되면서 국내에 해외 물자들이 밀물 듯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가 규제가 많고 당시 ‘배경’이 없으면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화물선에서 하역한 물자들이 소비자에 손에 전달되기 위해서 운송이 필요하다는 것에 착안해 운송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조중훈 회장은 배와 트럭을 헐값으로 사들여 직접 수리하면서 장비를 늘려나갔다. 이전 이연공업사를 운영한 경험으로 중고차를 구입해 엔진상태와 부품을 일일이 확인하고 고장난 자동차는 신속하게 교체해 운송기일을 철저히 지켰다. 조중훈 회장이 생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용’은 한진상사 시절부터 시작됐다.

미군수송 용역을 따낸 한진상사, 좌측에서 4번째 조중훈 회장(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미군수송 용역을 따낸 한진상사, 좌측에서 4번째 조중훈 회장(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창업 5년 만에 트럭 30대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탄탄한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전쟁 후 그에게 남은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회사 건물과 은행의 빚뿐이었다. 그는 서른셋의 나이에 재기를 위해 천막으로 세운 가건물에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트럭을 몇 대 장만했다. 담보는 그동안 쌓아놓은 ‘신용’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년 정도 지났을 때쯤 이전의 사세를 다시 회복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전과는 달랐다. 한진상사와 비슷한 규모의 운송기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조중훈 회장은 미군의 군수품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당시 미군의 군수품을 목숨을 걸고 절도하는 행위가 판을 치고 있었고 ‘한국인 = 도둑질’이라는 편견이 있는 미군은 한국 업체에게 군수물자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중훈 회장이 생각한 돌파구는 ‘신뢰’였다. 이를 위해 미군과 계약한 큰 업체의 하청을 받아 캔맥주를 한시적으로 대리수송하게 된다. 신뢰를 쌓아가던 조중훈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매일 같이 업무가 끝나면 직원들을 데리고 부두로 나가 미군들이 하역하는 것을 도와주고 트럭에 문제가 생기면 고쳐주기도 하면서 신뢰를 쌓아나갔다.

이후 조중훈 회장은 미군과 완벽한 신뢰관계를 구축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 파카 수송을 맡은 운전기사가 차떼기로 팔아먹은 것을 수습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1,300벌에 달하는 파카를 장물을 취득한 상인에게 약간의 이문을 보태주고 다시 사들여 현물을 인계해주고 확고한 신용을 얻은 것. 당시 이를 위해 3만 달러를 사채시장에서 융통해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이후 매년 성장해 1960년에는 한 해 동안 22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차량을 500대를 보유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에도 신뢰와 신용은 조중훈 회장의 큰 자산이 됐다.

적자나는 항공공사 인수로 하늘길 열어
베트남 전쟁 당시 국내에서 쌓은 미군과의 신뢰와 현지에서의 헌신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추진했던 퀴논항의 하역과 운송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진상사는 자본금 1,000억 원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3년 이륙하는 B747-200(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1973년 이륙하는 B747-200(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조중훈 회장은 육지가 끝나는 곳인 바다에서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정부로부터 뜻밖에 제안을 받게 된다. 국내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는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항공공사는 누적적자 27억 원에 보유항공기도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와 제트기 1대가 전부였다. 당시 조중훈 회장도 항공운송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항공공사를 인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대통령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강력하게 반대하던 임원들을 설득하고 항공사업 전면에 뛰어들게 된다. 현재 대한항공의 시작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1969년 3월 1일 대한항공을 출범하면서 감원하지 않고 당시로서 획기적이었던 성과급 제도를 도입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또 인력육성에 심혈을 기울여 자리에 사람을 배치하지 않고 사람을 보고 그에 맞는 일을 만들어 스스로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과감한 투자에도 나섰다.

수송능력을 갖추기 위해 기종을 늘리고 성능 좋은 제트기로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 항공기 도입을 결정한 후에는 국제선 항로 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조중훈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서울을 세계 하늘길의 중심으로 만드는 구상을 내비쳤다. 동남아 노선을 발판으로 항로를 꾸준히 늘려나가던 조중훈 회장은 가장 난관이었던 미주노선을 취항하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대한항공 출범 2년 만에 하늘길을 열었다. 첫 취항 도시는 로스앤젤레스였으며 여객기가 아닌 화물기를 먼저 띄우는 전략을 택했다. 1971년 4월 첫 항공기가 이륙해 12시간 만에 첫 번째 태평양 횡단을 성공했다. 이후 화물수요를 늘리며 대한항공의 이름을 시장에 알렸다. 화물기의 성공 이후 여객기 운행을 준비해 태평양을 또 다시 넘나들었으며 이후 잇따라 국제선을 개설하면서 세계적인 항공사로 발돋움해 나갔다. 이쯤 조중훈 회장은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선다. 대형기를 적용해 대량수송체계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다. 하지만 구입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판매처인 보잉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중훈 회장은 현금 구매를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1973년 5월 대한항공이 도입한 B747이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냈고 태평양 노선에 정식 투입됐다. 1973년은 서울과 파리를 잇는 북극항로를 통해 유럽에 진출한 해이기도 했다. 1974년에는 대형기를 화물노선에 투입하면서 약소국의 신생 항공사라는 대한항공의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현재 대한항공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다
조중훈 회장은 베트남 퀴논항에서 해운업에 대한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했다. 컨테이너가 바로 그것이다. 퀴논항에서 컨테이너에 매료된 그는 귀국하자마자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컨테이너선을 통해 국내 해운을 현대화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바다의 꿈을 이루고자한 것이다. 그렇게 대진해운이 1967년 설립됐다. 하지만 컨테이너선을 바로 도입하지는 못했다. 당시 국내에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없었던 탓이다. 조중훈 회장은 인천항의 민자부두 사업에 투자를 하는 동시에 노르웨이에서 12,000톤급 화물선을 들여와 한미일 정기항로에 투입했다. 1972년 컨테이선을 확보한 그는 부산 - 고베항로에 투입했다. 국내 해운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인왕호였다. 이를 통해 매출은 3년 만에 10배 이상 뛰었지만 오일쇼크라는 암초에 부치면서 대진해운은 해체되고 말았다. 

1987년 한진 사바나호 진수식(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1987년 한진 사바나호 진수식(출처_사업은 예술이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70년 씨랜드와 총대리점 계약을 맺고 컨테이너 해운 업무를 익혀가며 해운사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1974년 5월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준공되면서 조중훈 회장은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1977년 한진해운이 탄생했다. 한진해운 설립 후 컨테이선 확보에 박차를 가하면서 중동항로에 주목했다. 오일쇼크 이후 오일달러를 벌어들인 산유국들이 대대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하면서 물동량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선사들의 덤핑과 물동량 감소로 인해 실패를 맛봤다. 조중훈 회장은 여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1979년 극동-북미 항로, 1986년 북미동안항로에 취항하며 태평양 바닷길을 열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부채가 상환능력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당시 한진해운을 백지 상태에서 재건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조중훈 회장은 한진해운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조중훈 회장은 이를 위해 1970년대 중반에 비슷한 위기를 겪은 대한항공을 활용했다. 해운에 항공사식 경영을 도입했고 이는 성공이었다. 월평균 38억 원의 적자를 내던 한진해운이 1년새 10억 원대 흑자로 전환됐다. 1987년 한진해운은 다시 독자조직으로 환원 됐고 1년 만에 위탁경영은 종료됐다. 하지만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부로부터 누적적자가 7,500억 원에 달하는 대한선주를 인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조중훈 회장은 여러 차례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1988년 대한선주를 인수·합병한 한진해운은 지속적인 선대 확대와 항로 확장으로 성장하면서 국내 최대 해운회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현재 한진해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국내 해운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다.

조중훈 회장은 사업을 확장해오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송 외길을 올곧이 걸어왔다. 물류업을 주로 하지 않는 계열사들의 경우 물류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필요한 사업만 손댔던 것으로 유명하다. (땅, 하늘, 바다)길만을 개척해온 그는 물류산업이 현재의 위상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물류산업을 지탱하고 발전시켜온 진정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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