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스킷을 나눠먹는 여직원들 사이좋게 보여
- 남을 위한 배려는 여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필수

어젯밤을 오피스텔에서 자고 들어오는 큰 딸, 앵두가 거실로 들어서며 “아빠 이거 하도 먹고 싶어 사왔어” 하고 비닐봉지에 든 것을 주고 가기에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게으름 피우던 몸을 반쯤 일으켜 무엇이 들어 있나 보기 위해 손 느낌으로 무게를 가늠해 보며 펴보니 말랑말랑 먹음직한 가래떡이다. 그것도 온 식구가 같이 먹을 만큼 묵직한 양이다.
‘무엇일까?’와 동시에 나타나는 ’얼마나?’라는 두뇌반사작용 공식은 앵두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사들고 올 때 적용되는 나의 지각활동공식이다. 小食을 하는 앵두는 전에 비스킷을 사오더라도 제일 작은 것 ‘한 봉지’ 식으로 사들고 와 오물오물 먹는다. 아이들 엄마보고 “쟤가 무얼 사오는 것을 보면 장녀답지 않아, 살 때 다른 식구들 생각 좀 하라고 그래!”했더니 그 후엔 ‘두 봉지’ 식으로 사오는 것을 보겠다.
먹을 것 사오는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실은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스킷 한 봉지를 담소하며 나눠 먹는 여직원들을 보면 그들이 친한 사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약간의 먹거리를, 그것도 상대방이 즐겨먹는 것을 기억했다가 갖다 주면 정의 표현에 무게가 실린다. 직장에서도 인간관계를 잘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출출할 때 간식 먹으러 나가자고 동료들을 비밀스레 꼬시기를 잘하거나 가벼운 간식거리를 사와서 동료들과 함께 먹거나 하길 잘한다.
식구들이나 혹은 생활주변의 사람들과 좀 쩡한 사이가 됐을 때 평소의 친근한 얼굴을 하고 간식거리라도 같이 먹자고 내놓으면 쩡한 사이를 허물고 원래의 좋은 관계로 환원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윤활유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기는 서양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때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친밀감을 표시할 때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데, 사양할 때는 억지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동물을 길들일 때 먹이를 주는 것이 가장 호감을 사는 일이듯이 사람도 이와 같다.
내가 혼자 오피스텔에서 밤새우며 일하는 날 앵두가 방송국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교통편이 없어 안산 집으로 못 들어가고 오피스텔로 잠자러 올 때 앵두를 반기면서 그 애 손을 보곤 했었다. 혹시 커피 마실 때 같이 먹기 좋은 과자라도 한 봉지 들고 들어오며 ‘내가 커피 끓일 테니 아빠 같이 들자’고 하기라도 할까 하고 공연히 기대하며….
다음날 아침에 내가 먼저 출근하든 앵두가 먼저 나가든 앵두가 아침커피라도 끓여줄까 하는 기대로 자는 앵두를 깨워 “앵두야, 너 오늘 몇 시에 나가니? 아침커피라도 할 거냐?”하고 물을라치면 어김없이 “안 마셔, 나 좀 있다가 코오롱(스포츠센터)에 목욕하러 나갈래요”하고는 이불을 뒤집어 쓰곤 했다. 내가 직접 커피포트에 물을 끓일 때는 피곤해 하는 앵두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당뇨라서 무엇이든 먹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도 있어서 그러겠지만….
큰 딸 앵두는 검소한 성격이고 강한 성격이다. 불필요한 일에 돈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것은 절대로 사지 않는다. - 이 것은 커다란 장점도 된다. 특히 낭비와 사치풍조가 나라의 경제를 위태롭게 하는 요즈음에는 젊은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생활 속에서 지켜나간다는 것은 미덕에 속한다. - 이런 연유로 앵두는 위와 같은 생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앵두가 이런 날 차를 끓여주고 같이 마시면서 잠시 환담을 나누거나 아빠출근 시에 엄마 대신 시중들어 주던가 하는 일 따위에는 안중에 없이 잠만 자고 나가는 것은 ‘휴식이 충분하지 못한 만큼 잠을 최대한 자는 것이 좋다’는 신념을 지켜나간다는 원칙의 소산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다. 인생살이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앵두 같은 성격이나 가치관에서 보면 위와 같은 일은 돈이 남아돌 때, 시간이 남아돌 때나 하는 ‘여분의 몫’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것(인간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일)은 여분이 아니요 필수라는 사실을 깨달아 주면 좋겠다. - 아니 오히려 제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 따라서 절약의 대상에 이런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가족의 일원으로서든지 형제의 일원으로서든,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든 큰 인물은 반드시 이런 면에 배려가 많은 사람이라는 점, 특히 여자가 시집을 가면 이런 점에 대한 배려여부가 그 가정 속에서의 자기위치를 자리 매김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앵두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 모두 깊이 인식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오늘 떡을 다른 사람들 몫까지 넉넉하게 사 가지고 들어와서 앵두 덕에 식구 모두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앵두가 마치 내가 말하고자 한 요지를 알고 그렇게 한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덕분에 미련하게 양껏 먹고 속이 쓰려 소화제까지 먹고는 “역시 너무 많이 사오는 것은 평소의 앵두 신조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기에 그래도 정의 표시로 사오는 것은 안 사오거나 너무 적게 사오는 것보다 확실히 좋고 식구들 간에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앵두 보라고 이 글을 썼다
아빠가 - 1996년 9월 15일
이호영 베네모어통상대표/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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