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는 고객 섬기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 것”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USL, APL, PFEL, LYKES 등 해외 정기선사들의 한국대리점으로 명성을 높였던 극동해운의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극동해운은 협력 관계였던 퀴네앤드나겔과 손잡고 포워딩 기업 아세아익스프레스를 설립했는데 정은구 회장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포워딩서비스에 미래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선사대리점과 달리 다양한 물류의 역할과 솔루션을 펼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익 모델을 만들어간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1976년 해운항만청에서 국내 최초로 외항해상운송주선업 면허가 발급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망설임 없이 회사를 나와 삼영익스프레스를 세웠다.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의지와 그동안 축적한 경험이 그에게 용기를 줬다.

설립 초기부터 해외 진출 적극 나서
삼영익스프레스는 처음부터 해외 파트너사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물류 네트워크 구축을 지향했다. 그동안 해상운송과 포워딩에서 역량을 쌓았던 정은구 회장은 해외 파트너사와의 관계는 언제든 틀어질 수 있으며, 기업의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삼영익스프레스는 에이전트 형태가 아닌 독립적인 영업조직과 업무체계를 구축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의 지휘 아래 삼영익스프레스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로 네트워크를 하나둘 넓혀나갔다. 정 회장은 첫 번째 해외 사무소의 개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8년 12월 뉴욕에 처음 삼영익스프레스의 해외 사무소를 열었다. 뉴욕을 시작으로 80년 6월 LA, 85년 5월에 캐나다 토론토에 이어 86년 1월과 87년 5월에는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로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시장점유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특히 86~87년에는 미주 해상화물 시장점유율을 무려 5%까지 끌어 올렸는데, 미국 FMC가 삼영익스프레스를 아시아에서 가장 큰 NVOCC라며 주목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감안했을 때 중소기업 하나가 전체 시장점유율의 5%를 차지했다는 점은 국내는 물론 미국 물류업계에서도 이슈가 됐다. 이는 삼영익스프레스의 저력이 증명된 사례 중 하나로 남아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장이 정체되자 정은구 회장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에 시선을 돌렸다. 삼영익스프레스는 중국에 진출한 몇 안 되는 국내 포워더로 시장을 개척했고, 인근 동남아시아까지 네트워크를 넓혀나갔다. 당시 설립한 방글라데시 법인 ‘B-KO TRANS’와 독일 법인 ‘G-KO TRANS’는 현지 물류시장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베트남에서는 20년 넘게 사업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고 있다.

가파른 성장세를 구가하던 삼영익스프레스는 해운빌딩(현 한진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국내외에서 180여 명이 근무하는 대형 포워더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창업 초기에는 영업력 극대화를 위해 조직의 경직보다 최소한의 규제와 자율을 보장하고 유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우수한 인재 확보가 경영의 핵심이라고 보고 인재 발굴과 능력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해외연수와 포상 차원에서 영업직원들을 3개월 일정으로 미국 사무소에 보냈고, 사무직도 유럽으로 단기출장을 보내 선진국의 물류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기라 직원들은 물론 업계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실패와 좌절 딛고 성공 사례 만들어
정은구 회장은 항상 남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다. 1980년 국내 포워더로는 처음으로 보세장치장인 삼영CFS를 개장했으며, 85년에는 계열사인 동광익스프레스를 설립해 독립채산 위주의 경영과 영업 다변화를 꾀했고, 포워더로는 최초로 업무용 전산시스템을 개발했다. 88년에는 항공화물운송대리점 면허를 취득하고 쿠리어서비스 계열사인 삼영특송을 만들어 서류송달업에 뛰어들었다. 이외에도 LCL콘솔작업은 물론 특수화물 보관업, 컨테이너 리스 등 시장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며 수익모델을 만들었다. 그러나 항상 성공가도를 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정은구 회장은 자신에게도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생각해보면 실패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에서도 비롯되었다고 본다. 한·중 수교를 내다보고 인천창고부지를 매입하고 보세장치장을 마련한 것은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처분했으니 결국 실패라고 봐야 한다. 특송사업도 미래를 보고 선제적으로 착수했지만 전문인력과 경험 부족으로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도 결국 실패였다. 다행히 삼영특송은 삼영익스프레스를 떠나 3자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노조와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경영에 악영향을 끼친 것도 좌절했던 기억 중 하나다. 직원들에 대한 내 진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고,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견뎠던 기억이 있다.”

삼영익스프레스는 어려운 시기에도 기회를 창출하고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특히 국내 대기업 L사의 가전 수출 프로젝트를 수주해 기존 시베리아 횡단철도 대신 독일과 핀란드, 러시아로 이어지는 3국 간 해상운송 루트를 자체 개발해 성공시킨 사례는 당시 업계에서 화제가 됐으며 대기업들에게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월성원자력발전소 발전기기 수입 프로젝트와 잠실 L월드 신축자재 수입 등 당시 굵직한 물량을 수주하며 명성을 떨쳤다.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임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임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물류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봉사하고 싶다”
정은구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삼영익스프레스의 삼영(三榮)은 기독교적 의미와 더불어 그의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정 회장은 기도를 통해 자신은 물론 임직원들의 안녕을 바랐고, 회사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삼영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음으로 고객과 종업원의 영화(榮華)를, 마지막으로 육, 해, 공의 공간적 영달(榮達)을 의미하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포워딩 산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나에게 물류란 단순히 물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섬기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고객을 만나고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고민해왔다.”

삼영익스프레스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금리, 전쟁 등 대내외 악재로 포워딩 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삼영익스프레스는 여전히 고객들과 소통하며 최상의 물류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정은구 회장은 1호 외항해상운송주선업 면허를 받았던 때를 회상하고, 처음 시행한 제도라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에게 있어 경영은 늘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고 남들보다 먼저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세기 가까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어느덧 여든을 넘겼지만 의식하지 못한 채 바쁘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정은구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은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보다 꼼꼼히 점검하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젊고 유능한 후진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할 나이이기도 하다. 의욕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인간사 아닌가. 다만 아직 현역에 있는 만큼 경영 비전과 전략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도 매일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즐거움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전히 물류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물류를 통해 회사와 직원과 고객을 위한 봉사 말이다.”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은 물류를 통해 회사와 직원과 고객을 위헤 봉사하는 마음으로 경영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은 물류를 통해 회사와 직원과 고객을 위헤 봉사하는 마음으로 경영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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