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로버츠 / 다산북스

전쟁은 인류에게 많은 위기를 가져다주었지만 반면 인류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하다. 훌륭한 리더들은 대부분 전쟁의 역사를 공부한다. 전쟁의 이야기 속에는 위대한 승리의 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속에는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은 현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들의 리더십은 전쟁 못지않은 현 시대의 경쟁 환경 속에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전쟁학자인 앤드루 로버츠가 저술한 ‘승자의 DNA’에는 9명의 전쟁속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인물들이 과연 무엇을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정상의 자리에 섰는지와 승자의 위치에 서게 만드는 DNA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 책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9명의 인물에 대한 시사점
나폴레옹이 집권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확인했던 것은 군인들의 군화 상태였다. 유렵 전역으로 군대를 이끌고 행군 했던 나폴레옹 황제는 군인들의 군화가 해지거나 찢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직접 확인을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장교들에게는 엄격했으나, 일반 병사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행군 중 점심식사에는 반드시 잡역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들을 격려했다. 나폴레옹은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해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적들에 대해서도 적들이 모욕감을 더 크게 느낄수록 저항은 완강해질 것임을 군 수뇌부에게 알리고 적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이유는 사람을 등용함에 계급이나 신분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력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폴레옹이 현재까지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나폴레옹의 해상진출을 좌절시킨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함대의 제독이 호레이쇼 넬슨이다. 넬슨제독은 상대방이 끊임없이 수비에만 몰두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포식자의 본능으로 전투에 임했다. 넬슨의 공격본능은 상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나, 적어도 배 안에서는 절대적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비록 엄격한 원칙주의자이자 고지식했던 넬슨이었지만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수병들의 편에 서서 부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넬슨이 전략가, 전술가로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는 넬슨은 영국함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고려한 전술로 전투에서 승리를 했기 때문이다. 넬슨은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고 그들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야 함을 강조했고, 이를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위대한 승리를 했던 넬슨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하면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윈스터 처질 수상이 어려움 속에서도 버텨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강렬한 자기 확신이었다. 처질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명이고, 그 사람이 히틀러라고 이야기했다. 공포심을 일으키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 그를 움직이게 했고 히틀러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자양분이 되도록 만들었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를 포함해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그는 ‘용기’도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강화시킬 수 있는 자질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를 결코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갖게 만들었다. 처칠은 눈물이 많았다. 그의 눈물은 가식적인 눈물이 아니었다. 영국민들은 처질의 눈물을 솔직한 리더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눈물을 공감의 눈물로 생각했다. 처칠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운명에 맞서지 마라. 운명을 지배하라.’

2차 세계대전 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서 처칠 수상이 청중석을 가로질러 가장 먼저 악수를 나눈 사람이 조지 마셜 당시 미국무장관이었다. 조지 마셜 장군은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최종 지휘관으로 아이젠하워, 맥아더, 몽고메리 등 유명한 지휘관의 상관이었다. 수많은 선, 후배 장군들로부터 유일하게 존경을 받은 그의 이름이 다른 장군들에 비해 익숙하지 못한 이유는 수천만 군의 사령관으로서가 아닌 과묵하고 겸손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지 마셜 장군은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냉정한 두뇌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감정으로 인한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전시 상황에서 한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자제력과 집중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 보다 뛰어난 부하에게 임무를 위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신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을 지배한다.’ 전쟁을 승리하기 위한 조지 마셜 장군의 굳건한 신념이다.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는 독일과 개전 6주 만에 전쟁을 포기한다. 그러나 끝까지 독일에 맞선 자가 바로 샤를 드골 장군이다. 드골 장군은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괴뢰정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1급 수배자 명단에 올랐으나 영국으로 망명해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시까지 끝까지 독일에 맞섰다. 독일에 맞설 병력이나 군수물자도 미미했지만 드골은 프랑스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며, 연합군 내에서도 프랑스의 존재감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드골은 연합군의 수장인 처칠과 루스벨트에 대해 끊임없이 탄원과 요구를 관철시키려 했다. 드골은 프랑스의 처해진 상황으로 인해 온갖 하대와 박대에도 절대 콧대를 굽히지 않고 프랑스를 모욕할수록 더욱 강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자세는 미미한 프랑스군의 존재감을 연합군 내에 각인시키는데 공헌했으며, 루스벨트와 처칠은 드골을 잃게 되면 프랑스 전체를 잃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도록 만들었다. 오늘의 프랑스가 세계 강대국으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프랑스의 존재감을 끝까지 지켜내었던 샤를 드골 장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인 이유이다.

아이젠 하워는 인간성이 무시되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인간이 지녀야할 감각을 잃지 않은 유일한 군인이었다. 아이젠 하워는 연합군 내에서 유일한 중재자였으며, 모든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적이 없는 지휘관’이었다. 아이젠 하워의 능력은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얽혀있는 수많은 임무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적절한 임무에 대한 위임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에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총 사령관으로 그는 수개월동안 계획에만 전념했다. 이에 대해 많은 장군들은 그의 지나친 준비성에 대해 비아냥 거렸다. 이때 아이젠 하워는 “저들의 말대로 이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더 철저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계획은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뒤집어 놓게 된다. 독일의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은 후 아이젠 하워는 연합참모본부에 승전보고를 했다. ‘1945년 5월 7일 현지 시각 오전 2시 41분, 연합군의 임무는 완수되었다.’ 역사상 가장 완벽하면서도 정확하며, 간결한 승전 보고였다.

대처 수상은 과감한 결단과 신속한 행동이 그저 가슴만 졸이고 있는 김빠진 도덕성을 가진 타협가들의 행동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포클랜드 제도는 1765년 이후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영국에서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고 영국인 거주자 수는 1,800여명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하여 무단으로 점령했을 때, 이 사태에 대해 영국에서는 포클랜드를 차용협정 형태로 아르헨티나에게 양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재정문제가 심각해서 국방비 예산을 삭감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처는 달리 생각했다. 비록 이역만리이지만 영국의 영토가 침공을 받았고, 영국인들의 자유가 침해를 당했던 사실에 대해 영국이 타협을 한다면 그동안 세워 놓은 영국의 영광과 위신이 침해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은 3개월 간의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많은 세력들과 당당히 맞섰다.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는 침체된 대영제국 국민들에게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상을 세계에 각인 시켰다. 포클랜드에서의 승리는 대처에게 총리 임기동안 수많은 위기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선물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해서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려한 히틀러는 무엇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게끔 만들었을까? 히틀러는 그 어떤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위대한 게르만족의 부흥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사람들이 입 밖에 내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들끓고 있는 불만과 욕망을 표출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실에 순응하는 것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고 이를 활용했다. 이를 통해 상처가 난 독일제국 국민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아군을 모으는 일보다 적을 지정하는 데 훨씬 많은 고심을 했다. 적을 제대로 지정하면 많은 추종자들이 모일 것이라는 확신에서 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는 그룹을 고등교육을 받은 똑똑한 국민들로 정했고, 그 중 독일계 유대인을 그 대상으로 지정하여 독일계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에 대한 말살정책을 진행했다. 단 한명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4,700만 명의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목숨을 잃었다. 절망에 빠져있을 때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다. 그리고 그 영웅이 제시하는 상상력에 현실에 대한 도피처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상상력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히틀러를 통해 알 수 있다.

스탈린은 ‘공포정치’의 표상이다. 스탈린은 철저하게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당시 볼세비키당의 1인자였던 리프 트로츠키가 정적들에 의해 실각하자 2인자였던 스탈린이 그 대안으로 소비에트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사회의 모든 질병은 부르주아로부터 기인하며 이에 대한 치료법은 무자비한 제거로 규정했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에 대해 그는 ‘충분한 양은 질이 된다’라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으며, 그의 생각은 전쟁을 위한 무기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성능보다 양을 중시했으며, 이 양은 결국 질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의 제 1원칙은 무수한 사람 중에 한명의 암살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무수한 모든 사람이 암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방어에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는 결국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포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이는 모든 사람 앞에서 평등하다.’ 스탈린의 시대에는 그야말로 공포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였다.

앞에서 언급한 9명의 역사속의 인물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신념’이다. 그 신념은 자신을 지탱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나게 만들며, 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러한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념보다는 타협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신념은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신념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근성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신념은 자신감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지만 겸손함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념이 바로 ‘승자의 DNA’라는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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