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돈 요구 형태에서 합법 가장한 요구로 진화

최근 대형 제약사들이 수백억 원에 이르는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의료계와 약사계가 들썩이고 있다. 결국 의료계에서는 기자회견을 열고 의약품 리베이트와 관련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의료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리베이트가 관행처럼 횡행하고 있다. 물류업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 불거진 제약업계의 리베이트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라면 물류업계의 리베이트 관행은 아직 수면 아래에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제약업계처럼 법인카드를 제공해주거나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상납하진 않지만 입찰 건이 있거나 계약 시점이 다가올수록 뒷돈이 오가는 사례는 매우 많다는 게 물류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물류영업사원 80%, “부당한 요구 당해봤다”

물류신문사에서 대기업, 중소기업 물류업체와 택배업체 영업사원 29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을 실시한 결과, 약 80%가 넘는 이들이 화주기업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비롯한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투명성이 강조되어야할 대기업군은 최근 들어 이런 사례가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의 작은 요구에도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게 영업사원들의 얘기다.

물류업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리베이트 관행은 백마진이다. 주로 택배업계에서 일어나는 백마진 요구 실태는 본지에서도 수차례 기사화한 적이 있다. 이번 전화설문에서 백마진을 요구하는 화주기업들은 최근에는 많이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선 택배영업소 등에서는 백마진을 주면서까지 영업하는 이들이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 실질적인 택배계약 단가는 1,800원인데 2,000원으로 계약한 후 차액인 200원을 화주기업이나 담당자에게 뒷돈으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불한 돈에 대한 증빙은 가짜 세금계산서 등을 통해 메우고 있다.

중간에서 화주기업들을 대상으로 집중 영업을 하는 브로커들을 통해 백마진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화주기업과 택배회사 간에 직접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브로커 업체를 끼워 계약을 한 후, 정상적이지 않은 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것이다.

이번 전화설문에서 많은 물류업계 영업사원들은 갑인 화주기업 임원과 담당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상품권을 지급하고 있다고 답했다. 매월 수십만 원씩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있다는 이들도 있었다. 물류업체 영업사원이 주는 돈은 몇 십만 원에 불과하지만 많은 거래처를 확보하고 있는 화주기업 담당자의 경우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매월 5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주는 거래처가 5곳만 돼도 연간 3,000만 원의 리베이트를 받는 셈이다.

최근 들어 현금이 오가는 리베이트는 많이 줄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대신 합법적인 형태의 리베이트 요구 사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 현금으로 받던 리베이트만큼을 최근에는 합법적인 형태인 일명 ‘영업지원’ 명목으로 받는 화주기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판매하는 제품을 리베이트 금액만큼 구입해 줄 것을 요구하거나 자신들의 회식 때 참석해 회식비를 대신 결재해줄 것을 요구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자신들이 직접 채용해야 할 물류센터 인력 등을 물류기업에게 떠넘기는 화주들도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리베이트 비용으로 월 400만 원이 나갈 경우 합법적인 형태를 취하기 위해 영업지원금 명목으로 리베이트 액수만큼의 인력을 채용해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A사 물류영업사원은 “얼마 전 영업 중이던 화주기업으로부터 리베이트 금액 대신 현장 인력을 대신 고용해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물류센터 현장 인력 2명을 채용해 매월 인건비를 대신 지불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B사 물류영업사원도 “과거와 달리 투명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이 늘다보니 리베이트 관행도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며 “합법적이고 지능적인 요구로 바뀔 뿐 부당한 요구를 강요하는 이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복잡한 시장 구조가 관행 키워

리베이트 문제로 시끄러운 제약업계와 물류업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산업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제약업계는 다양한 판매처와 여러 도매상, 소매상 등이 어우러져 산업을 이루고 있다. 물류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물류업체와 운송사, 그 밑에 또 다른 운송사, 화물차주 등 최소 4단계 이상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복잡한 산업 구조는 다른 뜻으로 해석하면 그 만큼 투명하지 못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물류산업은 구조적으로 투명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기업들의 비자금 창구로 이용된다던지, 불법적인 거래 등으로 인해 언론의 뭇매를 맡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물류산업에는 전관예우 식으로 만들어진 기업들이 많다. 능력도 없는 회사를 중간에 넣으려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제약업계와 물류업계의 공통점은 또 있다. 동종업체 간 경쟁이 다른 산업군보다 치열하다는 것이다. 업체 간 치열한 경쟁은 저단가 수주는 물론 자신들의 쓸개까지도 빼주는 영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리베이트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물류업체들은 지금껏 내실보다는 외형 확대에 초점을 맞춘 영업을 일삼아왔다”며 “이 과정에서 리베이트, 백마진 등의 잘못된 영업형태가 만들어졌고, 서서히 관행으로 고착화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물류영업사원 K씨의 황당한 리베이트 경험담

H물류회사에 다니는 K씨는 얼마 전 있었던 화주기업 입찰 과정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같이 입찰에 참여했던 업체로부터 자신들의 자료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당장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K씨는 원래 경쟁업체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 때 다른 화주기업 컨설팅을 맡아 진행한 경험이 있는데 회사를 옮기면서 당시 만들었던 제안서 자료 등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이번 화주기업 입찰 때 그 자료 중 일부를 포함해 제안서를 만들어 발표했다. 그런데 발표 직후 바로 경쟁업체로부터 자신들의 자료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입찰 제안 발표는 화주기업 담당자들만 참석하고 비밀리에 단독으로 이뤄진다. 제안내용 역시 화주기업만 공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K씨의 제안서는 발표 후 바로 노출된 것이다. 이는 화주기업에서 유출시키지 않는 한 힘든 일이다.

경쟁업체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인해 K씨는 결국 입찰을 포기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징계를 받았다. K씨는 “어떻게 입찰 제안서가 경쟁업체에게 유출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 화주사 담당자가 그 업체에게서 뇌물을 받지 않고선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없다”며 한탄했다.

하청사에 리베이트 받는 물류기업도 상당수

화주기업에게 리베이트를 주는 물류회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청 운송업체 등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물류기업들도 상당수다. 최근 S물류사에서는 하청업체들로부터 정기적으로 리베이트를 받은 2명을 적발했다. S사에서는 이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쉬쉬하면서 적발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감사를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물류업체 관계자들 역시 하도급업체 또는 파트너사로부터 금품을 받는 경우가 많다. 특정업체의 물량이 줄어들게 될 경우 매출 축소는 물론 경영상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중견 물류회사들이 대기업군 물류회사 담당자들에게 뒷돈을 건네는 사례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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