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로지스틱스 - 에피소드로 읽는 상인열전

 

휴먼로지스틱스 / 에피소드로 읽는 상인열전

중국 商界의 재신(財神) 호설암(胡雪巖)

 

▲ 호설암의 젊은 시절부터 중년, 말년까지의 모습(사진 위에서부터)
    서양 열강들의 침탈과 농민반란 등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던 청나라 말. 항주의 한 허름한 찻집에서 전장(錢莊 : 중국의 구식 상업금융기관으로 노늘 날의 은행)의 수금사원과 별 볼일 없는 한 관리 지망생이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금사원은 사내와 찻집에서 자주 마주쳤던 지라 허물없이 싸구려 차나 마시며 빈둥거리는 이유를 물었다. 사내는 관직을 예약해 놓고도 돈이 없어 발령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매관매직이 판치던 때니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수금사원은 다음 날 은자 5백 냥을 사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건넸다.
별 볼 일 없던 사내는 수금사원의 돈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됐고, 수금사원은 그의 도움으로 훗날 중국 제일의 거상(巨商)으로 성장한다. 사내는 청말에 권력자로 부상한 왕유령(王有齡)이었고 수금사원은 오늘 날 중국의 재신으로 불리는 호설암이다.
이 페이소드는 호설암이 어떻게 중국 제일의 거상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자 그의 최후를 예견하게 하는 것이다.

호설암(1823~1885)의 일생
호설암의 원래 이름은 광용, 설암은 자(字)이다. 1823년 휘주 적계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고 비천했던 그는 열두 살의 나이에 홀어머니 곁을 떠나 항주로 가서 신화전장의 도제가 된다.
맨주먹으로 바닥부터 시작한 그는 중국 상계(商界)는 물론 청나라 조정의 정사까지 좌지우지하는 거상이 되었다. 그가 쌓은 부는 한 나라의 부와 견줄 만 했으며 조정으로부터 1품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紅頂商人)의 자리에 오르는 영예까지 누렸다.
그는 사업 영역을 해외로까지 넓혀 외국 자본을 청나라로 끌어들여 나라의 부를 일으키는 역할도 해냈다.

공급횡령으로 얻은 사업기회
앞서 짧게 소개한 호설암과 왕유령의 에피소드에는 뒷얘기가 더 있다.
당시 전장의 일개 수금사원이었던 호설암이 왕유령에게 건넨 은자 500냥은 사실 공금을 횡령 한 것이다. 이 일로 호설암은 전장에서 질책을 당하지만 훗날의 결과만 놓고 보면 호설암의 선택은 성공한 도박이 되었다.
호설암에게 돈을 받은 왕유령은 그 길로 상경하여 북경에서 민부우시랑(民部右侍郞)으로 있던 지인의 추천을 받아 절강성 양대총판(군식량관리부)의 자리를 얻는다. 출세를 하게 된 왕유령은 호설암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은자 5백 냥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절강성 순무로 부임한 왕유령은 호설암에게 군량미와 병기 등을 군납을 맡겼다. 이를 발판으로 호설암은 상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업에 진출해 관상(官商)으로 성장했다.
호설암은 왕유령 외에도 절강순무 황종환, 강소학정 하계청, 민절총독 좌종당 같은 권력자에게 접근해 수많은 ‘사업 기회’를 얻어 냈다. 물론 호설암은 그 대가로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주었다.

권력과의 결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왕유령이 호주지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왕유령은 호설암에게 호주의 공금고를 통째로 맡겼다. 호설암은 공금으로 양잠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 물론 원금은 다시 금고에 넣었지만 공금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후였다. 오늘 날에야 횡령과 유용 혐의로 쇠고랑을 찰 일이지만 혼란기 난세의 상인다운 행보임에는 틀림없다.
호설암의 이런 사업 행태는 그 뒤에도 계속된다, 절강순무 황종한을 설득해 자신이 설립한 약방에 지분투자를 하게 했다. 당시 약장사는 떼돈을 버는 사업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던 때고 전염병까지 유행을 했기때문이다. 하물며 권력자가 지분을 투자한 사업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호설암의 약국은 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호설암이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 관리들 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서양상인이다. 당시는 서양의 자본이 중국으로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다. 서양의 상인들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중국 관리의 힘이 필요했고, 호설암은 그 중간에서 둘 사이를 연결시켜 주면서 양쪽으로부터 커미션을 챙겼다.

▲ 호설망의 저택 전경
“권리(權利 : 권세와 이익)라는 말처럼 권세와 이득을 둘로 나눌 수 없다. 세가 있으면 곧 이가 있다. 지금은 이(利)를 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세(勢)를 얻어야 한다.”

자신의 말처럼 호설암이 가장 먼저 ‘권세의 힘’을 가지려고 애썼다. 다음은 당연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계의 힘을 얻는 것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강호의 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이 변하면서 들어온 서양의 힘을 얻었고 그것을 활용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그는 상도(商道)와 권도(權道)는 같은 원리하는, 힘과 이득은 동전의 양면같이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잘 알았던 사람이다.

기회경영이란 미래지향적인 경영기법이다. 남보다 먼저 미래의 사업기획인 기술, 상품, 서비스, 아이디어 등을 포착하여 사업화하여 기업 간의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인 청말의 중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런 혼란이야 말로 상인들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호설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장사를 하는 것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하면서도 변화 속에서 기회와 인연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제일가는 능력이다.”

하지만 아무나 혼란기의 기회를 잡아...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 일종의 지혜라면,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용기다. 호설암이 다른 상인들에 비해 탁월했던 점이 기회를 잡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 호설암을 소재로 한 중국 드라마의 포스터
호설암이 나라에 비견할 만 한 부를 쌓았지만 몰락은 한 순간이었다. 은자 3천만 냥에 이르던 가산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모든 재산을 잃은 호설암은 향년 63세에 혈혈단신 처연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몰락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치와 황음(荒淫)이었고 또 하나는 그를 키워준 권력의 힘이었다.

말년의 호설암은 거대하고 호화로운 12채의 집을 지었다. 그 호사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돌로 담장을 쌓고, 구리를 넣어서 벽돌을 만들고, 벽은 금칠을 하고 인공호수까지 팔 정도였다. 그 규모와 호화로움 때문에 외국관리들은 중국 정부가 정해준 호텔보다 그의 저택에서 머물기를 더 원했다고 할 정도다.

더욱 가관인 것은 12채의 집마다 한 명의 첩을 둔 것이다. 저녁이 되면 시녀가 12명의 첩의 이름이 적힌 상아패를 담은 은반을 가져 온다. 호설암은 아무거나 뒤집어 거기 이름이 적힌 첩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과거 아방궁을 만든 시황제의 그것을 흉내 낸 것이다. 그의 여색 탐닉은 그뿐이 아니었다.

자색이 뛰어난 여자를 보면 돈으로 사들여 짧게는 3~5일 길어야 1~2달 데리고 즐긴 후 돈을 주고 내보내거나 다른 곳으로 재가를 시켰다. 사치의 끝이 어떠한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호설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설암이 몰락을 부른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키워준 ‘권력’이었다. 호설암 말년의 중국 정계는 좌종당과 이홍장의 경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왕유령이 호설암의 사업 기초를 놓는 역할이었다면 좌종당은 그의 사업을 키워준 인물이다. 좌종당을 만나기전엔 지역의 부상이었지만 그를 만난 이후에는 중국 전체의 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기에 좌종당은 매번 전투사령관이 되어 전쟁에 나갔다. 이때마다 호설암은 그를 도왔다. 좌종당의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호설암의 병참물자가 먼저 움직일 정도였다. 호설암은 모자란 군수물자 조달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당시로는 아무도 상상도 못했던 외국상인들로부터 대출을 받아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외국상인들로부터 커미션을 잊지 않고 챙겼지만…. 결국 좌종당은 호설암의 돈과 능력을, 호설암은 죄종당의 권력을 이용해 공생한 것이다.

좌종당과 권력 투쟁 중이던 이홍장은 칼끝을 좌종당이 아닌 호설암을 향해 겨눴다. 좌종당을 무너뜨리려면 먼저 호설암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호설암은 좌종당과 이홍장의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누군가 호설암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요약했다.
‘장사 셈이 빠르고 정확하며, 강온양책을 병행하여 일석삼조의 성과를 거둘 줄 알며,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는 인물’이라고…

물론 청말의 혼란기라는 특수한 상황이 배경이 되었지만 적어도 그가 당대의 제일가는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勢)를 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란 전세(戰勢), 인세(人勢), 권세(權勢), 상세(商勢), 정세(情勢), 시세(時勢) 등을 말한다. 호설암은 특히  상세와 시세를 보는 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상인의 첫째 목표이다. 이익이 산처럼 쌓여 세상에 이름을 드높이는 것을 꿈꾸지 않는 경영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인의 진정한 모습은 재물의 축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명제이다. 이점에서 호설암은 많은 화두를 남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황금 화살을 아까워하면 황금 봉황을 잡을 수 없다
호설암의 용인술

유비가 제강공명을 얻는데 사용한 삼고초려는 인재 등용의 바이블로 여겨진다. 반면 호설암의 경우는 이와는 궤를 달리한다. ‘재(財)’로써 ‘재(才)’를 사는 것이 그가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여기에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호설암은 자신의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고른 사람을 쓰는 용인술에서도 호설암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면서까지 왕유령에게 은자 500냥을 빌려주었는데, 이것은 결코 목적 없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왕유령의 장래를 믿었고, 그에게 주는 금전적 도움을 투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용기도 필요하지만, 먼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호설암은 미래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물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