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이상기후, 물류를 덮치다

잦아지는 이상기후에 대한민국 물류 최전선 흔들

2025-11-05     석한글 기자

서울에 시간당 100mm가 넘는 물폭탄이 쏟아진 날, 마포구에서 택배를 배송하던 배송기사 박상철(가명) 씨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배송해야 할 물량은 100여 개가 남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로 배송 시간은 지체됐고, 폭우로부터 택배 상자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같은 시각, 부산·대구·광주·울산 등 남부지방은 ‘역대급’ 폭염에 신음하고 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배송기사들은 탈진의 위험과 싸웠으며, 물류센터와 항만에서는 현장 근무자들의 온열질환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졌다.

한반도에서 동시에 펼쳐진 이 두 풍경은 이상기후가 더 이상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닌, 눈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과거 ‘이변’으로 치부되던 기후 현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뉴노멀(New Normal)’이 되어, 우리 경제의 핵심인 육상·해상·항공 물류망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선 배송기사
‘라스트 마일’은 공급망의 어느 구간보다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배송기사와 라이더들은 도시 곳곳을 직접 누비며 최종 배송을 책임진다. 이 때문에 이들은 기후변화에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이들의 안전과 배송 품질을 지키는 것이 물류 산업의 새로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은 라스트 마일 현장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단순히 ‘더워서 힘든’ 수준을 넘는 폭염은 노동자들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시험한다. 온열질환의 위험뿐 아니라, 인지 능력 저하로 인한 오배송 및 사고 발생률도 높아진다. 이 때문에 일부 물류사와 이커머스 플랫폼은 혹서기 대책을 내놓고 있다.

CJ대한통운, 쿠팡, 한진, 롯데 등은 택배기사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작업중지권’을 도입·보장하고 있다. 기사가 스스로 작업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배송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회사는 이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고객사에도 배송 지연 가능성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등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도 힘쓰고 있다.

전국 물류센터에는 수백억 원을 투자해 냉방 및 환기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고, 근무자에게는 폭염 응급 키트와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를 배포했으며, ‘50분 근무, 10분 휴식’과 같은 의무 휴식 제도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더욱 강력해진 겨울의 혹한과 폭설이 이어진다.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강추위는 디젤 차량의 시동 불량을 유발하고, 최근 보급이 늘어난 전기 화물차의 배터리 효율을 급격히 떨어뜨려 운행 가능 거리를 단축시킨다.

도로 결빙과 폭설은 라스트 마일 배송 기사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다. 일부 산간 지역은 폭설로 인해 수일간 배송이 중단되기도 하며, 제설이 더딘 도심에서도 배송 지연이 발생하는 등 극한의 기상 상황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선다.

‘수출입 관문’ 항만·공항도 이상기후의 위협에 노출
경제에서 수출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에 있어, 이상기후로 인한 항만·해운 등의 글로벌 위기는 더욱 치명적이다. 기후변화로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서 태풍은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슈퍼 태풍’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수출입의 관문인 부산항은 슈퍼 태풍의 영향으로 컨테이너 크레인 가동이 전면 중단되고, 모든 선박의 입출항이 통제되기도 했다. 부산항을 비롯한 국내 주요 항만이 단 하루라도 폐쇄되면 이를 정상화하는 데는 일주일 이상이 소요된다.

항공 물류 역시 기후변화의 예외 지대가 아니다. 잦아진 국지성 호우와 폭설, 태풍은 공항 폐쇄와 항공편 결항으로 이어져 반도체, 의약품 등 긴급 화물의 운송을 제한하기도 한다. 또한 대기 불안정으로 인한 강력한 난기류(터뷸런스)의 발생 빈도 증가는 화물과 항공기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새로운 리스크로 떠오르고 있다.

해운 산업도 이상기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 해상 운송의 요지인 파나마 운하는 2023년 극심한 가뭄으로 담수호 수위가 낮아지며, 하루 통과 가능한 선박 수가 평소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다. 이로 인해 선박들은 인근 해상에서 무기한 대기하거나 웃돈을 주고 통과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해상 운임 급등, 운송 시간 증가로 이어져 국내 기업들의 수출 원가 부담을 키웠다.

기후 위기, 물류의 ‘뉴 리스크’로 떠올라
배송기사의 안전부터 국가 수출입의 관문인 항만과 공항, 나아가 글로벌 공급망까지. 물류 시스템의 그 어느 한 곳도 기후 위기의 안전지대는 없다. 이상기후는 과거 경험과 데이터에 기반한 기존 물류 시스템의 한계에 도달했으며, 기후에 대한 전면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의 이상기후는 단순히 날씨가 궂은 수준이 아니라, 매일매일 예측 불가능한 재난과 싸우는 기분”이라며 “이상기후가 물류 산업 전체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이상기후를 단발적인 ‘사건’이 아닌, 일상화된 변수로 보아야 하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는 물류 현장 근무자부터 기업, 산업,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단기적 대응에 그치지 않고 물류 공급망의 회복 탄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 차원의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기후 위기 상황에 대한 물류 운영 가이드라인 수립과 관련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지원 등, 민간 기업의 노력을 뒷받침하는 정책적 안전망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