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택 박사의 속속들이 ‘일본’⑩
우리와 다른 일본 ‘고객제일주의’의 개념 속 들여다보기 -후편-
한국과 다른 일본의 호칭 이해
지난호에서 일본의 고객개념은 ‘고객(お客様 오캬쿠사마)은 신(神様 카미사마)’라고 전했다. 이제 한국 사람에게 일본이란, 약간의 엔화와 카드, 스마트폰과 여권만 소지하면 아무런 장벽 없이 오갈 수 있어 해외여행이나 해외출장의 범주를 벗어난 듯 보인다. 일본현지 쇼핑센터나 식당, 온천 등에서 일본어는 몰라도 아마도 여러분들을 가리키며 ‘오캬쿠사마’라고 호칭하는 소리는 귀에 익숙할 수도 있다. 먼저, ‘오캬쿠사마’와 ‘카미사마’에서 ‘사마(様)’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일본에서는 친한 손아래 또는 동갑남자들을 부를 때 이름 뒤에 ‘~군(君)’, 또한 그런 여자에게는 ‘~쨩(ちゃん)’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나머지 남녀 손윗사람에 대한 그 경칭은 타나까상이나 나까무라상 등으로 귀에 익숙한 ‘~상(さん)’이다. ‘~상(さん)’은 우리의 ‘~씨(氏)’에 해당한다고는 할 수 있으나 손윗 연배 어르신에게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정서로는 거부감이 크다. 하지만 일본은 정반대로 나이와 아무런 상관없이 ‘~상(さん)’을 쓰니 사용 범위가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단, 일본에도 ‘~씨(氏)’라는 호칭은 있으며 주로 문어체나 대화중 제3자를 언급할 경우에 사용한다고는 하나, 일상대화에서는 ‘~상(さん)’이 ‘~씨(氏)’를 대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도 꼭 ‘~씨(氏)’라는 호칭을 확인하겠다는 호칭 매니아가 있다면 일본 재판소에 가보길 권장한다. 재판소에서 원고와 피고를 호명할 때 가장 많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본에서 ‘~씨(氏)’라는 호칭은 경칭이라고는 하나 그 속은 ‘친근감’이 싹 사라진 무미건조하며 ‘여차하면 적대관계로 변할 수 있음’이 내포된 호칭이니 우리나라의 ‘~씨(氏)’와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쯤은 비즈니스 상식으로도 이해해 둘 필요가 있겠다.
한국의 ‘님’ vs 일본의 ‘사마’
‘사마’의 이해는 우리와 다른 일본의 ‘고객제일주의’ 사상 이해와 직결된다. 우선, ‘사마’라고 부르는 대상은 ‘神(신, 천황, 황족)’과 더불어 ‘고객, 손님’이 神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또한 기업의 임직원에게는 주주도 ‘사마’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대상이다. 즉, ‘사마’는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배하는 절대적 ‘神’과 ‘主’격 차원인 것이며 진정 깊은 감사와 상하관계의 종속과 복종의 시그널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도 ‘~님’이 있으며 ‘객’을 ‘손님’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 속은 ‘사마’와는 ‘다르다’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의 종교적 차원과, ‘손님, 고객님, 아버님, 어머님, 선생님, 교수님, 장관님, 의원님, 스승님, 형님, 선배님, 회장님, 사장님, 부장님, 팀장님 등등…’, 하물며 고객으로서 택시나 버스를 승차했으면서 ‘기사님’이라 부르며 식당 손님으로서 주문을 하더라도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사장님’이라 부르는 일상 생활차원에도 ‘~님’이 포괄한다. 일본 기준으로 본다면 상대가 누구든 존중하고 정중한 건 좋으나 ‘~님’의 남발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님’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 문화의 뿌리가 다르다. 현대 일본은 집안에서 집안 어른을 직접 부를 때는 ‘~상(さん)’ 경칭이나 타인에게 내 가족을 소개할 때는 ‘~상(さん)’호칭조차도 생략되며 ‘저희 부친, 모친입니다’정도의 겸양문화이다. 정치관련 기자회견이나 국회청문회와 같은 장면에서도 상대가 수상이든 장관이든 호명에는 ‘~상(さん), 님’이 등장하는 일은 없다. 회사에서도 ‘회장님, 사장님’에서 ‘님’이 사라져, 직역하자면 사원이 회장님 사장님을 직접 부를 때조차 ‘회장(카이쬬-), 사장(샤쪼-)’이며 타인에 대해 자기회사 사장님을 소개할 때도 ‘이쪽은 우리회사 사장입니다’하며 ‘님’의 존재는 아예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수님, 선생님’라는 존칭은 없다. 둘 다 ‘先生(센세이)’라 부르며 소개한다. 반면,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고 땀 흘려 ‘수고와 노고’를 제공한 상대에게는 ‘ご馳走様 (고치소 사마, 잘 먹었습니다)’와 ‘お疲れ様 (오츠카레 사마, 수고하셨습니다)’가 일상의 감사 인사말로 오간다. 필자는 한국인이기에 일본어를 한국어로 통역할 때 ‘님’을 붙이는 것 쉽지만, 한국어를 일본어로 통역할 때의 호칭정리는 정확한 정보처리가 필요하며 이런 존칭과 겸양어 처리는 통역자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이기도 하다. 이는 독자들의 대일 비즈니스 장면에서도 유효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만큼 ‘사마’의 존재는 극히 제한되며 동시에 그 권위는 절대적이라는 사상이 녹아져 있음은 우리문화와는 무척 다른 일본의 ‘고객제일주의’의 이해 심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여성들이 인정한 한국인 ‘사마’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2003~2004년 일본의 뭇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버리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冬のソナタ, 후유노 소나타)’의 주인공 배용준씨를 일본여성들은 ‘욘사마’라고 불렀다. ‘사마’의 이해가 그닥 없었던 한국에서는 ‘욘사마’란 그저 배용준씨의 애칭정도로 여겨졌지만 일본에서는 무려 ‘사마’ 즉, ‘신격 존재’로 칭송받았던 것이다. 그가 일본 NHK방송에서 대중 앞에 나타난 장면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륵보살이었다.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일본 중년여성이 눈감고 ‘합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경이롭기 충분했었다. 또한, 배용준씨 역시, 미륵보살의 아우라로 말없이 미소 짓고 우아하게 손을 저으며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이후 ‘욘사마’를 그리워하던 여성들은 파찡코에서 대리만족하는 현상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렇듯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있어 ‘욘사마’는 앞으로도 영원한 ‘사마’이다. 이것이 일본의 ‘사마’의 위력이다.
‘사마’의 이중성
‘사마’의 이해 심화와 그 위력의 이해가 깊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사마’는 상대와 대상이 누구인가를 너머 인간과 그 이상의 ‘차원’구분을 명확히 나누는 용어이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사마’앞에서는 ‘저’라는 존재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작은 인간에 불과하며, 감히 ‘사마’앞에서 어떻게 제 개인적 욕심과 주장을 할 수 있겠으며, 하물며 거역과 배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분부만 내려주시면 영광으로 여겨 목숨 걸고 그 사명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상대를 높이기보다 스스로의 존재를 바닥 아래까지 조아리는 극 겸양 의식과 절대적 권위주의라는 상반된 의식이 뿌리 속 깊이 녹아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인류에서 일본어만큼 겸양어가 발달되고 존경어와 겸양어의 고차가 큰 언어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이로 인한 일본인의 행동양식은 겉으론 한없이 친절한 듯 하면서도 동시에 순간 고압적으로 돌변하는 이중성을 때때로 경험하곤 한다. ‘타테마에와 혼네’가 공식화된 문화임이 납득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아무리 ‘고객제일주의’정신이 강하다하더라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이 당장 눈앞에 도산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오캬쿠사마’를 모시기 위한 여력 따윈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사마’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퇴색되어 비록 그 농도는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중 우량기업들의 그 뿌리는 맥맥히 건재하다는 것이 필자가 현지에서 살면서 관찰하고 느끼는 바이다.
‘사마’의 존재는 절대적 위력인 동시에 위협
‘사마’의 절대적 존재와 자기 겸양의식은 일본인의 정신과 무의식속에 남아 있다는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이후 80년간 8월 15일은 우리에게는 ‘광복절’, 일본에게는 ‘종전기념일’이다. 세계사에서는 일본이 ‘패전’했음에도 일본만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의 ‘神’이 국민들을 위해 종결시켰다는 ‘종전’이며 또한 이를 ‘기념’한다는 축일이다. ‘神’에게 ‘패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사마’라는 가치관은 神風(카미카제)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겨우 14~15세의 어린 생명들이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미군함을 향해 혼자 상공에서 돌진하며 그들의 명예로운(?) 사명(仕)을 다하게 한 것이다. 이에 반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특공대 조종사는 죽을 때까지 불명예로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일본은 죽은 이들을 인간에서 ‘神’으로 승화시켜 국가 리더들이 ‘神’으로서 모시고 참배를 하는 곳이 ‘야스쿠니神社’인 것이다. 패전 이후 ‘사마’를 향한 카미카제 정신은 ‘일본군’에서 복장과 제품만 다르지 고스란히 ‘기업전사’로 이전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어느 학자에 따르자면 카미카제의 군함 돌진 적중률은 고작 7%에 불과하다고 한다. 즉, 93%의 어린 생명들은 벚꽃잎 떨어지듯 하늘에서 태평양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는 말이다. 한편, 한국에는 뭔가 혼자서 치고나가고 해결하는 사람을 ‘도코다이’라는 익숙한 단어로 부른다. 이 ‘도코다이’는 상기 카미카제 ‘특공대(特攻隊)’의 일본 발음인 ‘톡코우타이’가 그 어원인데, ‘도코다이’보다 ‘함께’를 권장한다.
신사(神社)와 회사(會社)는 동일 개념
일본에서 신을 모시는 ‘神社(신사)’는 종교 법인으로, 등록된 숫자만 8만 곳, 비등록까지 포함하면 20만~30만 곳으로 편의점 숫자의 3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1신사 1신’이라면 이미 30만의 신이 일본 곳곳에 존재하는 셈이다. 한편, 기업 등 법인숫자는 수년전 조사에서 368만사가 또한 각각의 ‘고객’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다. ‘신사(神社)’와 ‘회사(會社)’에 공통되는 부분이 ‘사(社)’이다. ‘사(社 야시로)’는 신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 건물’을 뜻한다. 즉, ‘회사(會社)’란 ‘고객’이라는 ‘神’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며 수입을 얻기 위한 노동을 하는 곳이 아닌 ‘고객神’을 모시기 위해 함께 모여(會) 혼을 담아 ‘봉납하고 봉사(仕事 시고토)’하는 곳이라는 논리라면 독자여러분은 납득하고 수용하겠는가? 더불어, 이것이 ‘모노즈쿠리’ 정신이자 사상이며 철학이라면 우리나라 제조업계가 소화할 수 있겠는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열정 넘치는 대부분의 기업은 이 일본의 ‘모노즈쿠리’ 철학과 TPS방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지만 그 속까지 이해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실제 일본기업들은 회사 부지 내에 미니 ‘신사(神社)’가 있는 곳이 많다. 반면, 회사가 고객을 위함이 아닌 나 자신만의 행복과 수입만을 위한 수단적 공간이라면, 그 또한 과연 기업의 존속이 가능할까? 지금 독자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존재가치와 고객과 나의 업무 관계를 어떻게 재정의 할지는 온전히 독자 몫이겠지만 재정의에 따라서 고객과 일을 대하는 진심과 태도의 변화에 따라 회사 다니는 재미와 보람, 기업성과는 달라진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경영학의 큰 연구 테마이다. 즉,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하다. 가치업무는 육체가 아니라 AI에는 아직 없는 가치관 전환이 필요하며 진심이라는 ‘마음’이 태도를 바꾸고 행복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