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로 정복하는 골프 (18)

이윽고 티업 시간이 다가와 동반자와 더불어 티 그라운드(teeing ground)를 향해 걸어갈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정리된다. 내면적으로는 그동안의 설렘이나 기대, 흥분, 걱정들이 추상의 선을 넘어 긴장으로 접어든다.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숭이나 허풍 떨 여유가 없다. 사실상 말이 필요 없어진다. 샷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언행을 검증해야 한다. 캐디와 주고받는 첫인상에 신경 쓰며 골프백에 다가가 장갑이나 티, 마크, 공, 그린보수기 등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면서 동반자의 무기(클럽)를 흘끔거린다.
잔뜩 내숭을 떨었다면 첫 드라이버를 환상의 ‘굿 샷’으로 날려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속내를 다지고, 허풍을 떤 경우는 첫 드라이버를 어떻게 하면 실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다보니 말은 없어질 수밖에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행운을 빌며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클럽하우스를 나와 티그라운드를 향해 걸어갈 때가 어쩌면 골퍼에겐 가장 겸손하고 진솔한 시간일 수 있다. 진정한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게 아니라 말을 적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진지하게 잘 쳐 보자’는 의도에서 내기를 한다고 변명하는데 필자의 견해는 (적어도 골프에서는) 위로받고 싶은 심리가 내기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골프 쳐서 딴 돈으로 비용을 충당하려 하거나 생활에 보태 쓰려는 사람은 (그 방면의 범죄꾼 외에는) 없다. 기대보다 많이 쳐도 돈을 땄다면 (그래서 캐디피라도 묻어간다면) 자기 위안은 될 것이기에 내기를 한다.
그 작은 위안을 선점하려는 일차적 시도는 샷이 아닌 핸디캡 흥정으로 나타난다. 핸디캡이란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플레이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골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탁구를 칠 때도 10점 접어준다면 그것이 핸디캡이요, 200점 당구와 300점 당구가 함께 겨루면 그 수를 인정하는 것이 같은 제도이다.
골프에서 핸디캡은 기준 타수(par)를 웃도는 숫자를 말한다. 기준 타수는 보통 72인데 프로가 아닌 이상 언더를 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추어는 100타 이내로만 치면 두루두루 무난하다. 골프 천국인 미국에서 100타 이내를 치는 사람은 10%가 안 된다.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골프채를 잡은 지 6개월만 되면 거의 다 100타 이내요, 1년 넘으면 자칭 보기플레이어가 절반을 넘는다. 1년이 넘어서도 월백(越百)한다 하면 운동신경이 형편없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다시피 한다. 가히 골프 천재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보기는 18홀로 이루어진 각 홀에서 1타씩만 더 치는 것으로 (물론 평균이지만) 90타 실력이다. 아마추어의 이상이라 할 보기플레이 실력을 유지하려면 연습장도 부지런히 찾아야 하고 매주 라운딩을 해야 할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다. 골프광이었던 미국의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나 조지 부시, 빌 클린턴이 모두 90 돌파를 열망하였지만 이루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아이젠하워 골프’를 만들어 그 꿈을 이루려 했다. 아이젠하워 골프란 공을 그린에 올린 뒤 원 퍼팅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안 들어가면 투 퍼팅으로 계산된다. 쓰리퍼팅은 없는 것이다. 그린 위에서의 지나친 긴장이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의사의 권유에서 만들어졌던 룰이다.
한국의 대통령 중에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 있어 함께 라운딩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분이 ‘아이젠하워 골프’를 했다. “아이젠하워 골프군요”하고 아는 체(?) 했더니 그는 웃으며  “아이젠하워? 이건 프레지던트 골프야”하고 점잖게 바로 잡아(?) 준 일도 있었다. 
단언컨대, 한국을 아마추어 골프 천재의 나라로 만든 것은 운동신경이 아니라 ‘OK’와 ‘멀리건’의 남발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환영 받지 못할 한국식 골프이다. ‘OK’는 골프장 수가 한참 모자랐을 때 밀려드는 내장객을 빨리빨리 해소하는 골프장 경영 측의 비책이었다. 골프장은 진행이 빨라져 좋고 골퍼는 점수가 잘 나와 기분 좋으니 요즘 언어로 윈윈전략이었던 셈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일반적 풍속이 되다보니 스트로크 방식의 내기를 할 때 핸디캡 흥정이랄까 시비가 분분해지기 일쑤다. 잘 치는 쪽에서는 적게 주려하고, 받는 쪽에서는 한두 점이라도 많이 받으려고 하는데 원인은 핸디캡 자체가 자신 없는 숫자라는 데 있는 것이다. 밀고 당기는 시간은 빨리 간다. 클럽하우스에서 티그라운드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고작 5분 내외이다. 티 그라운드 뒤에서 앞 팀이 빠지길 기다리는 시간 또한 10분 내외이다. 안 할 거면 모르지만 할 거면 빨리 결정해야 한다. 결국 주는 쪽이 강자가 된다. 받는 쪽이 양보하는 선에서 흥정은 곧 끝난다. (끝내 흥정이 안 돼 스킨스나 기타 방식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룰(내기)이 정해졌다면 남은 건 결전이다. 스타트라인을 코앞에 두고 드라이버를 휘둘러본다. 따 먹으려는 마음보다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른다. 흥정이 불리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티 그라운드 뒤에서 보다 힘주어 연습한다. 노련한 골퍼는 그런 모습 보는 것을 즐긴다. ‘흐흐흐흐. 열심히 힘주어 휘둘러라’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그 노련한 골퍼는 주머니에서 티를 하나 꺼내 눈높이에 놓고 본다. 티는 골프에서, 각 홀에서 제1타를 칠 때 공을 얹어놓는 용품이다. 요즘은 다양한 재료의 기능성 티가 많지만 20년 전만해도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값싼) 티가 전부였다. 티에서 골프는 시작된다. 노련한 골퍼는 티를 바라보며 과거의 골프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리고 오늘 골프의 행운을 기원한다.  
유원지에 있는 회전목마. 카메라 앵글이 그 중 한 목마의 눈을 계속 줌 업 해 들어가면 이윽고 푸른 평원이 펼쳐지며 기운차게 달리는 야생마가 상상에서 펼쳐지듯 골프는 그 작은 티 너머에서 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한국에서 그 하찮은 티를 가장 사랑한 사람은 호암 이병철 회장이었다. 그 다음은 아마도 이 글을 연재하는 반취(半醉)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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