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물류신문 국장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과년한 딸에게 좋은 혼처가 났다. 돈 많은 유부남이로되 처에게서 대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하자 씨받이라고 얻었으면 하는 남자쪽의 입장과, 없는 처지에 앞날이 없어보이는 열 여섯 먹은 딸아이 호강(?)이나 시켜보자는 지지리도 못난 여자쪽 아비의 어리석은 욕심이 뜻 맞음을 하여 생겨난 혼처다.
하지만 낳고 보니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 딸인지라 양쪽이 모두 낭패를 보게 되었다. 남자쪽에서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등을 돌렸고, 친정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노라'며 딸 아이와 사생아 꼴이 된 손녀를 '식객'으로 취급하는, 말 그대로 드라마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때는 1970년대 중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아이의 엄마가 택한 길은 16개월 된 딸 아이의 해외 입양이었다.
네덜란드 양부모 밑에서 큰 탈 없이 자란 아이가 정체성 혼란에 빠진 것은 자기의 친 엄마가 원치 않던 길로 접어들었던 때와 같은 16세가 되어서다. 이성에 눈을 뜬 아이는 오빠의 친구를 마음에 두었지만 '눈 파랗고 긴 금발머리의 여자 아이 없을까'며 오빠에게 여자소개를 부탁하는 그의 말을 엿듣고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살아오는 동안 '검은 눈에 검은 머리'인 자신의 외모가 이처럼 자신을 옥죄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아이의 고민은 '뿌리 찾기'로 발전됐고 네덜란드와 한국의 해외입양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아 한국을 방문, 친 엄마를 만나게 됐다.
혈육, 그것도 産苦를 함께 한 모녀의 16년만의 만남.
이 이야기는 네덜란드 작사 띠너꺼 헨드릭스가 지은 <집으로 가는 길>(사계절)의 스토리를 약간 각색하여 본 것이다. 작가는 냉정했다. 작가는 그 만남의 시간을 (적어도 아이에게 있어서는)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분위기를 깨야 할 것 같은' 견디기 어려운 시간으로 그렸다. 아이는 네덜란드에 돌아와 자기를 길러준 양 엄마에게 "저는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뿌리를 내린 곳은 네덜란드예요"라고 말한다.
작가는 아이의 눈을 빌려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둘이 함께 보낸 삶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 상황을 해석했다.
해석은 그렇게 했지만, 이 책은 '혈연이 뛰어넘을 수 없는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는 데 대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서구적 사고를 가진 아이는 자기의 친 엄마가 자기를 해외 입양시켜야 했던 상황을 좀체 받아들일 수 없다. 친 엄마도 마찬가지. 그녀는 그 아이가 인사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점, 어른을 빤히 쳐다보며 대놓고 노골적인 질문을 했던 점, 웃을 때도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던 점,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웠던 점을 '있을 수 없는 일' '양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때문'으로 돌리고 만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던가? 그러나 세상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문화적 거리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 너무도 많다.

저작권자 © 물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