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에는 약 8억의 인구가 기아와 만성적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작게 잡아도 10명중 1명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소말리아나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첨단의 과학기술로도 이러한 기아와 영양실조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지구다.

인류학자들은 지구 곳곳에 만연한, 아니, 문명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미개'의 지역에 만연한 기아와 만성적 영양실조의 원인을 '구조적 모순'에서 찾고 있다.
'식량은 부족한데 인구는 많다'는 것이 기아로 시달리는 지역의 일반적 특성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지구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정보다.
방글라데시의 농업생산능력은 국민 모두를 배불리 먹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굶겨 죽일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기아'라는 말만 나오면 떠올려지는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도 농산물 수입량보다는 수출량이 많은 나라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아야 할까?

인류학자들은 그 원인을 이들 국가의 농산물생산 및 분배구조의 왜곡에서 찾고 있다. 인류학을 전공한 최협 교수는 그의 책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풀빛, 2004.5)에서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굶주림의 문제는 농산루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농산물 생산구조와 분배주조상의 왜곡 및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예가 아프리카에서 찾아진다. 식민통치 이전 아프리카 농민들은 자급자족했다. 그러나 식민통치자들이 그들이 대대로 재배해오던 곡물들 대신 커피나 담배, 사탕수수 등 현금화할 수 있는 기호작물로 바꾸도록 강제함으로써 환경파괴와 함께 자금자족의 구조를 깨는 결과를 낳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후에도 농업정책을 바꾸지 못해 값싼 수입 농산물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사람들이 먹을 곡물 부족의 원인으로 '사료용 곡물 재배 확산'이 꼽힌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40퍼센트는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라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서구 선진국들이나 많은 나라의 고소득계층이 선호하는 쇠고기와 같은 양질의 육류를 생산, 조달하기 위해 많은 토지가 할애되고 있는 것이다.

최협 교수의 책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에는 과거 '야만'의 시절, 수렵.채집인들이 얼마나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하루 평균 2시간에서 많아야 6시간 가량 노동하고도 충분한 영향을 취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평화를 즐겼다고 한다. 이런 수렵.채집 사회를 두고 인류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풀요로운 사회'라고 칭했다.
그러나 '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인들은 어떤가? 1주일에 40시간에서 50시간을 일하고도 시간에 쫓기고 허기져 한다. 물론 배고파 허기지다는 얘기는 아니다.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렵.채집 사회를 '야만'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문명'과 '발전'을 신화로 삼는 현대인들의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이는 '문명사회의 허위의식'이다. 또 우리는 '식량은 부족한데 인구는 많은 사회'를 '야만'으로 바라보도록 교육 받아 왔다. 이는 그들 사회의 생산과 분배구조를 왜곡시킨 선진 서구인들의 자기중심적 역사관과 인류사회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다.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랄프 린튼(Ralph Linton)의 글 '100펴센트 미국인'이 소개돼 있다. 가장 미국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부하는 평범한 미국인의 일상생활을 살펴봄으로써 '미국의 것'은 하나도 없음을 보여준다는 내용이다.

그가 입고 있는 파자마는 동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며, 그가 누워 있는 치대는 인도와 근동지방에서 처음 재배되었던 면과 목화로 이루어져 있다. 욕실의 거울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처음 사용했고, 수세식 화장실 역시 기원전 수백년전 파키스탄의 모헨조 다로나 크레타의 크로노스 등지에서 이미 갖추고 살았던 문명의 이기들이다. 그가 즐기는 넥타이는 17세기 크로아티아인들이 둘렀던 목도리가 변형된 것이며 빼놓을 수 없는 기호식품, 커피는 원래 에티오피아 식물로 아랍인들이 발견했다. 또 그는 근동에서 재배가 시작된 곡류를 말려 가공한 것을 우유에 타 먹거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즐겨 먹었던 와플(waffle)에다가 원래는 중동에서 화장품으로 사용하던 버터를 발라 막는다.

과연 그에게 '미국'은 있는가? 이 글은 '자기중심적 문화주의', '문명의 독선'을 꼬집는 글이다. 이 같은 '문명'의 독선이 '야만'을 '불행'으로 왜곡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의미가 담긴 글로 해석된다.

'문명'과 '야만'의 얘기를 이처럼 체계 없이 늘어놓은 이유는 '문명'과 선진 서구를 성토하겠다거나 그들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온 우리를 성토하자는 데 있지는 않다. '앞서 나간다는 것', '발전한다는 것'에 인류의 삶을 왜곡시킬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를 되짚어 보자는 의미다. 또한 우리가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말하는 것들을 자기중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 지 되돌아 보자는 의미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못사는 나라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시각에 대해서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역시 자기중심적 문화주의나 문명의 독선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묻고 물어볼 일이다.

 

저작권자 © 물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