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의 유라시아 물류이야기 18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컨테이너 정기선은 크게 두 가지 루트가 있다. 먼저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발트해의 페테르부르크 항구나 흑해의 노보로시스크 항구로 들어가는 노선이다. 한편 동해를 통하여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나호드카(Nakhodka)-보스토치니(Vostochny) 또는 사할린 섬의 코사코브 항구 등으로 들어가는 직항 노선이 있다.

통상 한-러 컨테이너 정기선을 말할 때에는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노선이 아니라 동해를 오가는 직항 노선을 일컫는다. 한-러 컨테이너 정기선이 어떻게 운영되어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소해운’
1990년 한국의 북방 정책과 소련의 개방 정책으로 한-소 해운 물동량이 증가하였다. 당시에는 한-소를 오가는부정기선을 사용하거나, 일본을 경유하는 정기선을 사용하였다. 한-소 구간의 선적서류에는 부산이라고 적지 못하고, ‘Moji2’라고 적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당시 해운법에 따르면 원양 선사인 현대상선이 부산~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근해 운송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현대상선은 천경해운과 함께 근해선사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한국과 소련을 오가는 해운사라는 의미로 ‘한소해운’이라고 칭하였다. 1990년도에 설립하였으므로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이다. 한국 측의 한소해운과 러시아 측의 FESCO는 부산항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오가는 한-러 직항 컨테이너 정기선을 개설하기로 한다(한편 1999년에 원양 및 근해 항로를 구분하는 제도가 없어지자, 한소해운은 현대상선에 합병되었다).

동해해운, 한-소 직항로 열다
1991년 7월 한-소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한국과 소련 간 차관 물자의 수송을 위해 정기 항로가 개설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현대상선이 러시아에서는 FESCO가 운항 선사로 선정되었다.

두 선사는 동해를 따라 한-러 구간을 공동으로 선박 운항하되. 균등하게 선복투입체제를 유지키로 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영업하되, 50 : 50으로 이익과 비용을 배분하기로 합의한다. 즉, 공동 운항이나 선복 교환보다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키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현대상선에서 51%, FESCO에서 49% 지분으로 자본금 3억 원의 합작 대리점 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상선에서 동해해운의 대표이사를 맡았고, FESCO에서 동해해운의 부대표를 맡았다. 동해해운은 알짜배기 회사였다. 대기업이라도 매월 말이나 성수기가 찾아오면 한-러 항로 선복을 예약하기 위하여 동해해운의 영업사원들에게 사전에 부탁을 해야 했다. 부산에서 미국이나 중동, 유럽으로 보내는 운임보다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는 운임이 비슷하거나 더 비쌌다.

선임 체계는 얼마나 복잡했는지 선적품목별로 운임이 달랐다. 미주나 구주 구간의 운임표는 한두 줄이면 되는데, 이 짧은 한-러 구간의 운임표가 무려 4페이지가 넘었다. 당시 필자가 운임을 책정하는 사원이었는데. 운임 간소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결재서류를 몇 번이나 올렸던 기억이 난다. 현대상선과 FESCO는 한-러 항로에서 상당한 매출과 수익을 창출하였고, 한-러 해상 운송 시장을 선점한다.

경쟁 시대로 접어들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에서 경쟁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였고 한국의 일부 포워더들이 동해해운의 독점을 개방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현대상선은 해상 구간에서 더 나아가 핀란드, 알마티, 타슈켄트, 모스크바로의 내륙운송 서비스, 즉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복합운송을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시장은 우진, 천지, 시레일, 세계해운 등 러시아 전문 포워더가 주도하는 시장이었다. 이에 일부 포워더들은 독점 선사가 포워더 영역까지 침범한다며 반발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점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2001년 7월 이후부터 Transmarine, Sovcomflot, MCL Shipping 등 소형 선사들이 한꺼번에 한-러 동해 해상 운항에 참여하였다. 저렴한 화물들을 대량으로 운송하거나, 부산이 아닌 마산에 기항하는 방식이거나, 중-러를 오가면서 들르는 방식으로 동해해운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고려해운, 천경해운, 범주해운 3사가 공동으로 선박을 투입하여 합동 운항하였고, 동남아 해운과 장금상선, APL, Maersk도 한-러 항로에 발을 내딛었다. 한-러 항로는 조금씩 열려나갔다.

HMM-FESCO, 합작 접다
현대상선(HMM)과 FESCO는 균등선복투입, 이익 및 비용을 균등배분하는 체제를 해체하고 각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다. 대략 7~8년 전의 일이다. FESCO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크바로 본사를 옮긴지 오래되었고, 컨테이너 플랫폼을 많이 확보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발을 내디뎠다. 굳이 현대상선과 합작하지 않더라도 한-러 구간을 운항하고 영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현대상선도 매번 FESCO와 협의해 가면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다. 양사는 각자의 길로 가는 것을 택한다. 결국 한-러 구간 독점이 사라진 마당에 굳이 한 살림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이에 양사는 서로 헤어지되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가기로 한다. 따라서 동해해운도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동해해운 직원들은 주로 FESCO 한국법인으로 이동하였으며, 일부 직원들은 현대상선으로 넘어갔다.

한-러 항로 운항선사들
현대상선, FESCO뿐 아니라 Maersk, SINOKOR, CMA 등도 비교적 오랫동안 한-러 컨테이너 정기선을 유지하고 있다. 한-러 운항 선사들은 주로(중국/동남아~) 부산항과 블라디보스토크, 보스토치니 항구를 오간다. 가끔씩은 포항, 속초, 인천, 광양 등도 일정 기간 운항하기도 한다. 한편 사할린쉬핑이라고 불리는 SASCO는 부산과 사할린 섬의 남쪽에 위치한 코사코브항을 정기적으로 직항 운항하면서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의 해운을 담당한다.

한-러 컨테이너 정기선 항로는 최근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연해주, 사할린을 목적지로 하는 화물도 있지만 대부분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를 통해 아시아와 시베리아, 모스크바, 중앙아시아를 오가는 화물들이다.
2) 운송일수가 약 3일로 짧은 편인데도 정시성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3) North Bound 물량이 South Bound 물량보다 많다.
4) 선사 컨테이너가 아닌 화주 자체 컨테이너를 선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5) 9~12월은 한-러 구간의 일반적인 성수기이며 1~2월은 비수기이다.
6) 수에즈 운하 루트나 중국 경유 루트와 경쟁한다.

1991년 이후 약 28여 년간 한-러 컨테이너 정기선은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한국과 연해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중앙아시아, 사할린을 연결해왔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남북철도가 연결되는 즈음이 되면 한-러 항로가 축소될 수 있겠지만, 한-러 항로의 순항과 발전을 응원해본다.

2000년 이전의 한-러 항로에 대하여 도움 말씀을 주신 서갑식 선배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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