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에서 ‘E-commerce’의 등장까지

모바일로 주문한 상품을 다음날이면 받을 수 있고 원한다면 당일에도 배송받을 수 있는 시대이다. 또 손쉽게 반품 할 수 있고 배송 불가능한 상품이 없는 시대가 현재이다.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택배를 보낼 수 있고 집에서 직접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무인택배함을 이용해 퇴근길에 찾아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류산업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유통채널이 늘어날 때마다 뒤에서 묵묵히 이를 지원하는 것이 물류라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류라는 용어가 국내에서 법적으로 사용된 시점은 1991년 화물유통촉진법의 제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로 26년여가 흐른 지금은 물류라는 용어는 법적 용어를 넘어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물류업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물류산업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것이다. 이러한 과정 안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물류산업의 긍정적인 일도, 부정적인 일도 많았다. 또한 내부적인 요인에 따라 또는 외부적인 환경변화에 따라 물류산업은 변화를 거듭해왔고 물류산업의 현재를 만든 단초가 됐다. 과거가 없었다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현재의 물류가 만들어지기까지 과거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봤다.

물류표준화
국내의 물류표준화는 1995년 12월 물류표준화의 종합적인 기준인 KS A 1638규격의 유니트로드 시스템 통칙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의 기업들은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에 당시 산업자원부는 1999년 물류표준화의 활성화를 위해 물류표준인증마크제도와 표준물류바코드 도입 등 6개 부문의 물류표준화 확산·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했다. 또한 물류표준화를 위해 물류표준설비인증제도를 2004년 7월 시행했다. 같은 해 일본 도쿄 도시센터호텔 국제회의장에서 한중일 3국 민간표준 전문가 7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제3회 동북아 표준협력회의에서 3개국은 T-11형 파렛트의 확산을 위한 아시아 파렛트 표준화기구 설립을 심도 있게 협의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GPS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 로 사 용하고 있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인공위성 자동위치 측정 시스템으로 1970년대 후반 미국 국방부에서 군사목적으로 개발해 실용화 한 기술이다. 국내에서는 1996년 GPS의 모든 인프라를 독점한 미국이 민간분야에 한해서 GPS신호를 무료로 중단없이 제공할 것을 약속함에 따라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1997년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분야는 GPS를 이용한 차량항법장치(CNS)로 국내 20여개사에 달하는 GPS 업체가 대부분 이 분야에 집중돼 있었다. 물류산업에서는 1997년 말부터 GPS를 활용한 첨단화물운송시스템들이 속속 등장했고 본격적으로 활용이 시작됐으며 공로운송은 물론 철도, 선박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GPS 위치 오차를 보조해주는 DGPS(Differential 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항법정보시스템)도 등장했다.

IMF
IMF 구제금융은 우리나라 산업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물류기업들은 경유가 인상으로 운송비용이 상승했고 화주기업들이 이를 보전해주지 않으면서 어려운 시기를 지내야 했다. 해운기업들은 환차손으로 인해 생사에 갈림길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했다. 또한 국내 SOC 투자도 어려움을 겪었다. 민자로 진행됐던 SOC 사업들의 시행사가 도산하고 일부 사업자들은 납입자본금을 못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각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을 슬림하게 재편하고 필요 없는 자산을 매각해 유동자산을 늘렸다. 물류산업이 재평가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제조, 유통 기업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물류를 중요한 비용절감의 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 즉 물류를 잘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일부 형성되기도 했다.

물류바코드
표준물류바코드 보급은 1999년 6월부터 SCM시범사업의 일환으로 LG유통과 한국물류 등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표준물류용 바코드인 EAN-14가 부착되어 있는 상품은 시범사업자의 전체 취급상품의 3%가 넘지 않았다. 더욱이 국내업체의 생산제품 중 올바른 위치에 식별가능한 색상과크기, 인쇄품질을 가진 제품은 약 10여종에 불과한 상태였다. 또한 대부분의 많은 업체들이 각기 필요에 따라 포장박스의 외부에 다양한 바코드를 부착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서 대형유통업체들도 표준물류바코드를 도입하게 된다. 당시 산업자원부는 표준 물류바코드 도입 등 물류시스템의 표준화를 위해서 유통합리화 자금을 지원하는 등 기업의 물류표준화 활성화를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
1992년 1단계 공사를 시작한 인천공항은 2001년 3월 개항한 국제공항이다. 인천국제공항은 김포국제공항이 여객 및 화물 수송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항공 운송수요를 대처하기 위해 건설됐다. 하지만 초기에는 물류비 증가와 화물처리 시간 지체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운송시간이 길어지고 고속도로 통행료, 유류비, 인건비 등으로 인해 전체적인 물류비 상승에 대한 우려였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동북아의 물류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은 해가 갈수록 개항 초기의 우려를 말끔하게 해소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항으로 자리매김 했다. 최근 인천국제공항은 2010년에 기록한 최고 물동량을 넘어 역대 최고 처리실적을 기록하며 2013년 두바이공항에 내줬던 국제화물처리실적 세계 2위 자리를 다시 탈환을 노리고 있다.

화물연대 파업
2003년 국내 화물 운송시장은 일대 파란을 겪게 된다. 그동안 물류시장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오던 화물육상운송시장이 전면 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화물연대는 2003년 5월 전국적인 파업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산업전반으로 전국적인 ‘물류대란’이 현실화 됐으며, 파업에 들어간 화물연대는 파업일정을 정하지 않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하고 물류수송을 전면 중단시켰다. 화물연대 파업은 광양과 충청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아래 국내 전 산업을 일거에 마비시켜 물류를 잘 모르던 일반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편 당시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해 정부관계자와 화물연대 간부들을 포함한 공청회를 갖고 문제를 대화를 통해 풀려고 시도했지만, 공청회에 정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 등 안일하게 대처하면서 문제의 불씨를 키웠다. 이후 유가보조금 지급 및 다단계 금지, 화물 차량 증차 금지 등 다양한 법과 제도가 발표됐지만, 해마다 화물연대의 파업은 되풀이 되고 있다.

물류부동산 해외자본의 유입
국내 개별 물류시설 시장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이슈는 외국자본의 국내 투자이다. 2003년부터 프로로지스와 AMB와 같은 미국계 투자사들이 국내 물류시설에 대한 투자를 진행해 초기의 물류부동산 시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 물류부동산 시장은 건축물의 규모와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
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단지 미국계 투자사와 소수의 국내 투자자만이 높은 임대 수익률에 매력을 느껴 투자를 했다. 이러한 시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공실이 늘어나면서 미국계 투자사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국내 투자자도 물류시설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거나 철수하는 등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탈출하는 시기부터 싱가포르계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타격을 입었던 국내 투자사들은 해외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투자 하지 못했고 이에 당시 물류부동산 시장은 싱가포르계 자본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미국, 일본, 유럽 등 해외자본은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국내의 투자자들도 다시 한 번 관심을 갖게 되면서 현재의 물류부동산 시장을 형성하게 됐다.

물류센터 화재
2008년 물류센터 화재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1월초 이천시 마장면 유산리의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4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12월에는 서이천의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현장 근무자를 포함해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두 번의 사고로 인해 물류창고의 안전불감증과 미비한 법규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우선 건설시 사용했던 외장재에 대한 문제가 재기 됐다. 두 창고 모두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져 불길이 빨리 번졌고 유독가스로 인해 피해가 커졌다. 또한 당시 소방법상 스프링클러와 소화전 설치가 강제규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방 설비의 미비로 인한 초기 대응에 실패, 결국은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후 물류창고 화재에 대비한 건축법과 소방법이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물류센터의 개발 비용이 높아졌지만 좀 더 안전한 환경의 물류센터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됐다. 당시 화재가 난 물류센터는 외국계 자본이 투자를 한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해 외국계 자본의 물류센터 투자에도 영향을 미쳤다.

E-Commerce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이용한 상거래는 이미 1997년부터 새로운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당시에 인터넷 상거래, EC 등으로 불리며 시장을 형성했지만 물류시장에서는 이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들이 인터넷쇼핑 사업을 오픈하고 개인 인터넷쇼핑몰 창업 붐이 일어나고 TV홈쇼핑 등의 신개념 유통채널도 속속 등장했다. 온라인쇼핑협회가 발표한 2010년 온라인쇼핑업태 실적 자료에 따르면 온라인쇼핑 시장 규모는 약 34.2조 원으로 2009년 대비 25% 성장했으며 대형마트를 제치고 넘버원 유통 업태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2010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제품·서비스를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소셜커머스가 등장,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소셜커머스는 불과 2년여 만에 1조 원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E-Commerce기업 시장의 성장으로 물량이 늘자 기업들은 물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기존의 물류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를 론칭하거나 직접 물류투자와 배송에 뛰어들어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親 물류정부의 탄생(김대중, 노무현 정부)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역대 정부 중에서 물류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첫 정부로 기억된다. 김대중 정부의 가장 대표적인 물류정책은 국가물류기본계획의 수립이다. 2001년 모습을 드러낸 국가물류기본계획은 물류강국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과 물류산업의 체질 개선, 경쟁력 강화와 물류기술의 고도화 등을 목표로 삼은 20년 단위의 계획이다. 물류산업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김대중 정부를 이어받은 노무현 정부도 물류산업에 있어 친화적인 정부로 평가된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물류를 앞세워 ‘동북아 물류 중심기지 구축’ 전략을 세웠다는 점이다. 또한 부실논란과 막대한 비용, IMF 등이 겹쳐 오랫동안 지연됐던 인천국제공항을 완공시킨 것도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물류허브 전략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운 분야에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던 항운노조 상용화, 종합물류기업 인증, 사상 첫 FTA 체결 등 물류산업에 많은 기여를 했던 정부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두 전 대통령이 현재의 물류산업이 있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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